지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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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지이호는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전문사 과정 중에 있다. 서울울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인간 신체의 유한성에 주목한다. 첨단 과학의 발전 속에서도 인간 모두는 자신의 신체 내부를 직접 확인할 수 없고, 디지털화된 이미지로만 접할 수 있다. 작품은 그 자체로 물리적 몸을 가진 존재로, 우리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인간의 몸을 환기하며 자신의 몸에 내재된 타자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평등한 육체적 경험에서부터 공감대라는 비물리적인 생명성을 자아내며 유기체 일반을 아우르게 된다. 작가의 물성 실험은 바느질, 페인팅, 콜라주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되어 가며 제한되지 않은 형식으로 구현된다. 작가가 지향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스펙타클한 시각성을 필두로 하여 인간 신체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불러 일으킨다.

- 큐레이팅 글

미지(未知)는 호기심을, 때로는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치밀하게도 무모하게도 이루어졌다. 모든 지적 생명체의 본능인 호기심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동하며 인간을 지금의 인간으로서 살게 했다. 광활한 태양계와 드넓은 바다에 대한 동경으로 등장한 우주선, 잠수함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은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 일상의 가장 긴밀한 곳에서 ‘알 수 없음‘의 상태로 남아있는, 그것은 바로 나의 몸이다. 

생명체는 몸을 단위로 삶을 지속하기에 저마다의 다른 몸을 갖는다. 유토피아적 풍경에서 모든 존재는 하나의 유기체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한계 지어진 물리적 기반에 머물러 있다. 나는 나의 신체에 고여있는 존재이므로 나와 당신의 방정식을 참으로 만드는 미지수의 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각자의 우주이기에, 모두의 우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는 서로의 몸을 마주할 수는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접속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몸으로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렇기에 서로의 고통을 더듬어 보게 된다. 나와 당신이 연속체라면 불가능했을 단편적 존재만의 힘이다. 

그렇기에 지이호는 몸을 택하고 고민한다. 그가 구현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 서서 관람자와 대면하며 상호작용하는 몸을 갖는다. 시간 속에서 다치기도 하고, 늙어가기도 하는 몸. 작품의 몸은 생명체 일반의 소통을 매개하는 장이면서도 나름의 리듬으로 박동하는 몸이 된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 자체의 변용 역량을 존중하고 보강하며 작품의 생을 돕는다. 그가 작품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돌봄’은 손바느질, 콜라주 등 정식화되지 않은 다양한 물성으로 가시화된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간극을 두고 발현된 작품의 몸은 존재의 몸을 다시금 화두로 제시한다. 당신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꿈으로 사랑으로 그리고 희망으로? 우리 모두가 부정하지 않을 답이 있다면, 그것은 몸이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간다. 분화된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는 몸의 단위로 환원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어떤 철학자의 이데아에서, 그리고 어떤 가상의 세계 속에서. 그러나 미결의 영역으로 남아있기에, 그리고 마땅히 할당되기에 몸이 갖는 고유함이 있다. 작가는 이를 전시장으로 소환하여 분절된 몸들의 왕래를 가능케한다. 언젠가 몸은 구시대적 매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생명체들을 자르고 또 묶어놓는 것은 몸의 작용이기에 우리는 공명의 증거로서 몸을 맞대어 본다. 비물리적인 공감의 맥락은 비로소 개체화된 몸의 토대 위에서 태어난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여러 갈래가 분화되어 갈수록 존재에 대한 이해는 더욱 소홀해지고 미진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몸은 우리 존재를 아우르는 공통 기반으로서 서로의 단면을 맞대어 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몸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한, 여러 갈래로 나뉘다가도 그것의 토양 위에 한 가락으로 집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바로 여기서 지이호의 작업은 몸을 상술하는 해체와 접합의 장으로서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한데 불러 모은다. 존재를 관통하는 접속의 운율은 그렇게 울려퍼진다.
이재희

우리는 천 가지의 몸을 가졌다. 우리 생명체는 개인과 개인이 각자의 신체 영역을  그린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몸이 갈라져 있으니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렇게 멀어진 사이에는 공유되지 못하는 것들이 방랑한다.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들은 이해되지 못하고 억척같이 벌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세상의 많은 장애와 질병 가운데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얕다. 누군가는 신체적 회복을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구매했을 의료 용품이 그 질병을 경험하지 못한 개체에게는 심미적으로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재활을 위한 훈련 도구인 ‘핀치 운동 훈련기’는 지이호의 상상에 의해 면과 부분으로 해체되고 평면으로 재조합되어 <Sammons Preston 핀치 운동 훈련기 A1966T - Pinch Exerciser>로 재탄생한다. 우리는 서로의 몸에 대해 한없이 무지하기에 그 몸으로 살아가는 서로의 삶에 대해서도 파편적으로만 짐작할 수 있다.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가지의 삶이 존재하는데 나머지 구백 아흔 아홉 가지 삶에 대해서는 미지한 채로 살아간다. 

내가 가진 한 가지의 삶마저도 부지의 상태로 헤매고 있다. 개별 생명체는 자기 몸뚱이와도 분리되어 미완의 경험만을 연속시키며 살아간다. 의료 엘리트라고 명명되는 외과 의사에게도 예외는 없다. 환자의 신체 내부를 관찰하며 조작할 수 있는 의사조차도 자신의 피부 아래만큼은 두 눈으로 관찰하지 못한다. 지이호의 <외과 의사>는 스스로의 몸을 온전하게 조명할 수 없는 이러한 불안정성과 그로 인한 무력감을 이야기한다. 명확한 형체를 알 수 없이 늘어뜨린 천은 두 발로 지탱하고 있는 듯 신체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신체의 형식에 단단히 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형태는 등 뒤의 매듭을 통해 연결되는데 이 매듭을 통해 수술포는 두 가지 몸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가진다. 굳건히 서 있는 신체와 자신의 신체에 대해 한없이 무력하여 무너져버린 두 몸의 대비를 표식화하는데, 두 몸체의 힘이 대비될수록 그러한 속성은 더 강화된다. 내 몸과 나를 완전한 하나라 여기며 살아왔거니 결국 나는 반만 남겨지게 된 것이다.

피부 뚜껑 아래는 상상 속에만 머물러 있다. 죽어도 죽어서도 내 명맥의 뿌리는 나는 모르는 것이다. 지이호는 <양상자> 시리즈를 통해 동화 ‘어린 왕자’를 차용하여 양상자 천 구멍 너머로 신체를 들여다보는 외과 의사의 관찰 경험을 빗대어 표현한다. 상자 속의 양을 상상하여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어린 왕자의 역할은 환자의 몸 안을 대리 관찰하여 전달해주는 외과 의사의 역할로 치환된다. 그러나 어린 왕자와 외과 의사의 매개가 부재한 개인의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주체에게 가장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존재하며 짐작의 영역으로만 남게 된다. 반면 알 수 없기 때문에 작동하는 상상, 불안, 걱정은 신체적 안녕을 포함한 몸의 다양한 가능성,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더듬도록 이끌어낸다. 

한편 인간 개체는 파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의 육신을 통해서 나의 그것도 회득할 수 있으며, 신체를 가졌다는 공통분모에서 서로의 몸뚱이를 바라보며 공감을 움틔울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돌봄이라는 행위로 확장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주무르고 돌아본다. 지이호는 작품 또한 다치고 회복하는 몸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고, 작품의 삶을 위해 실천하는 여러 가지 돌봄을 가시화한다. 작품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부동불변의 고요함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인지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나 또한 얼마나 많은 돌봄을 매개로 구축되어 왔는지를 더듬어보게 된다. 또한 돌봄은 우리가 따로 떨어진 몸을 가졌기에 가능한 작용으로, 차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보태어 채워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가 되지 못한 몸들은 서로가 떨어져 있기에 유효할 수 있었던 것들을 공유해온 관계가 되어 파편성과 생명성의 양립으로 이어진다. 스스로는 해체될지라도 비물리적인 경로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어, 여신한 생명성을 드러낸다. 내 안에서만 돌던 것들이 생명의 너울을 타고 타인의 굴레로 스며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한데 모여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것이다.
김은서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C.A.S.언피지컬 리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