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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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정상우는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학사 졸업 후, 서울 망우동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정상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각자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오랜 시간 기억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그저 사라질 것을 기다리는 이야기 조차 작가는 붙잡아 그만의 표현 방식으로 남기고자 한다. 파편적인 흔적의 형태를 한 이야기들은 그 자체가 비서사적이고 비맥락적이다. 이야기를 수집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는 비맥락적인 것들의 집합체를 만드는데, 이는 잔존의 한 형태이다. 작가의 표현으로 ‘두서없이 뻗어 나가는' 낙서 드로잉과 이를 ‘더듬더듬 엮은' 영상 작업은 곧 생명의 약동과 잔존, 그 이중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목적없이 헤매고 있는 형태 없는 이야기들을 동정하는 작가는 그 모든 것을 긍정하며 세상의 한 편에 자리잡도록 돕는다. 

- 큐레이팅 글

발전하는 과학 기술 속, 특히나 매체의 발달은 인간이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아카이브적 충동을 부추겼다. 계속해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인간은 수집한 자료를 공개하고자 하고, 동시에 아카이브에 담긴 정보를 보호하고 숨기고자 하는,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반복 – 강박의 과정을 거친다. 데리다가 제기하는 아카이브에 대한 질문과 가설은 모두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카이브의 객관적 근원, 즉 살아있는 기억에 다가가려는 시도는 결국 검열이나 탄압에 의해 좌절된 망각된 기억의 사후작용이다. 하여 아카이브 너머의 망각과 기억의 재생 과정은 트라우마의 재현방식과 동일하게 반복 – 강박의 조정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카이브를 행하는 것(archiving)은 우리가 행동함에 따라 새로운 기록이 또 남겨지고, 이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반추되기 때문이다. 자료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닿고자 하는 진실과 가장 가깝고 유의미한 것들을 추구한다. 그 자체로 완결된 것, 혹은 완결을 가능케 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하여금 우리는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계획한다.

아카이빙을 하기 전, 자료를 수집할 때 인간은 서사성이 존재하고, 동시에 완결된 이야기를 선호한다. 안정된 이 자료들은 이야기가 끝맺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꺼내어 질 수 있고, 또 다른 이야기들과 관계 맺기가 용이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잔존하는 형태로 남겨진다. 그에 비해 불안정한 자료들, 예컨대 미완결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선별의 과정에서 배제된 채 언젠가 사라질 것을 기다린다. 끊임없이 생산되어 떠다니는 이야기 가운데 정상우는 어설프게 숨어있는 사람, 하염없이 달아나는 뒷모습, 만사에 무관심 한 듯 날아가는 새 등에 관심을 보인다. 그가 집중하는 이 대상들의 공통점은 불분명한 목적 속 계획되지 않는 서사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고정된 서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스스로를 내몰아간다. 

<대령과 두 번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오독의 과정은 고정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의식적인 행위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1927~)의 소설 『백년의 고독』 중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죽음의 장면에서 묘사된 가이나소 떼의 움직임은 철저히 소외된 죽음, 그리고 거룩한 죽음으로 해석된다.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양자 중에 작가가 오인한 후자의 해석은 대령의 죽음에서 거슬러 올라가 그의 생애 또한 수행자, 초월자와 같은 모습을 띄도록 한다. 이때 우리는 작가가 오독으로 하여금 또 다른 서사 생성의 가능성을 예기(豫期)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오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사용한 매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마치 ‘낙서’한 듯 그려 나간 작가의 드로잉은 완벽하게 재단되지도, 완전한 날것도 아닌 합판 위 목탄으로 얼룩처럼 남겨지고 이 옆에는 파편 조각과도 같은 2D 애니메이션이 덧대어 진다. 낙서의 형태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하찮기에, 우리는 이를 완벽한 서사성이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병치되면서 단 하나의 서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부정하는 과정이 여러 번 중첩됨으로써 이미지와 이야기를 꼬이게 만든다. 즉, 가느다란 오독이 꼬이고 얽혀 동아줄 같은 형태를 보이며, 곧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정상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오독의 과정, 드로잉 또는 2D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는 낙서 매체는 맥락이 불분명한 채 헤매는 이야기들, 곧 소멸될 이야기들이 우리 곁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 자체로는 무용할 지 몰라도 작가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우리에게 현시 되는 이야기들은 주변의 것들을 붙잡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이나경

생명은 때로 생존의 증거가 된다. 생존했다는 것. 그것은 어딘가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나의 족적이 여전히 간직되고 있음의 확증이다. 일종의 생체 저장 장치로서 ‘나’ 자신과 분리되는 ‘존재’는 불안을 내면화한다. 나눠 담기지 않은 유일무이의 저장소로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 속에 매 순간 스스로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안에 축적된 정보에는 인과성과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다. 비이성과 이성의 경계가 모호한 선택의 순간들이 뒤엉켜 있으며, 심지어는 주체성을 온전히 떠난 듯 보이는 순간마저 존재하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에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형상으로 비치는 탑은 ‘나’에게 만큼은 지극히 견고한 환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순간 ‘나’와 ‘존재’를 면밀히 살핌으로써 둘 사이의 괴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된 몇 축복받은 ‘나’들은 불안함을 느낀다. 일명 ‘존재의 불안’에 닿게 되는 것이다.

정상우는 이 같은 불안에 주목한다. 그는 불안이 존재와 불가분적 요소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그의 작업은 불안의 승화가 아닌, 불안의 풍랑에 작가 자신을 내맡기기 위함이다. 비논리적인 축적과, 환각 같은 견고함이 자아내는 위태로움의 구현을 위해 작가는 서사의 당위성과 인과성을 삭제한다. ‘작업'의 목적성 아래 형성될 수 있는 인위적인 방향성을 삭제하고, 오직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감 - 혹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이는 ‘정처 없음의 수집'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수집의 과정에는 작가 특유의 강렬한 흑백 낙서가 함께한다. 작가는 전통적으로 완결성의 대척점에 있어 왔던 낙서의 관용적 맥락을 십분 활용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마치 이야기꾼이 소재를 풀어놓듯 완벽히 짜이지도, 완전한 날것도 아닌 중간자적 상태로 남으며 불분명한 모든 것들 사이의 헤맴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정도(正道)없는 나아감과, 그사이 의도되지 않은 정처 없는 수집은 자유 비행을 동경하도록 만든다. 아슬한 걸음 사이, 당당한 날갯짓으로 쏜살같이 앞서가는 새는 어느새 나의 목표로 둔갑해 있다. 어떠한 인과성도 존재하지 않는 비논리적인 변화임에도, 이미 존재론적 불안감에 매몰된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때문에 정상우의 <새잡기>에는 오직 순도 높은 갈망만이 담겨 있다. 붙잡고자 하는 손에는 틀림없이 간절함이 스며 있으나, 그 대상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것으로 관절의 움직임에는 어쩔 수 없는 서투름이 묻어난다.

새들이 만들어 내는 자유 궤적을 좇으며 나아가는 ‘나’는 역설적으로 ‘정도(正道)’ 위에 올려진다. 새들의 몸짓은 어느새 스스로 만들어 낸 이상의 틀이 되어, 나로 하여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유를 좇았으되 결국 자유와는 정반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자유 추구의 역설’을 놓치지 않는다. 때문에 그가 담아낸 화면 속 인물은 동경의 존재를 곧 잡을 듯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찬 모습이다. 일그러진 표정과 어둠 속에 곧 잠길 듯 어른거리는 손끝은 곧 잡힐 비정형의 어떤 것을 손아귀에 두었음이 아닌, 어쩔 줄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한 방황의 몸짓으로 읽히는 듯하다. 정상우는 또한 이 같은 역설이 만들어 내는 딜레마적 고통을 새와 사냥꾼의 관계에 비유한다. 새가 되고자 달렸으나 그 끝에 마주한 것은 마침내 자유를 체화한 누군가 대신 무자비한 사냥꾼이었다는 것이다. 
박윤아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C.A.S.언피지컬 리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