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정의되지 않는 힘이다. 이 비물리적인 움직임은 잠들어 있는 사물을 틔우고, 전면에 세우고, 존재로서 기능하도록 하며 이 모든 과정에 역학적 작용으로 개입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구성되는 모든 순간에 있어 생명은 점과 선, 표면, 구조에 이르는 모든 개체에 운동성을 부여한다. 존재의 근원을 발동시키는 힘과 근원 분자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리듬은 유기적인 이미지를 채우며 또 다른 생명을 발동하게 한다. 

     이미지는 복합적인 운동의 현장에서 산발적이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제멋대로 결집했다가 해체하고, 등장과 퇴장을 마음대로 결정한다. 이 생명-이미지는 수없는 탈바꿈을 거쳐 외형을 탈피하고 마침내 관념만으로 존재하게 될 때도 그 자체로 유의미한 생성의 출현으로서 자리한다. 한편 잔존(Weiterleben)은 생성적 생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동작한다. 이들은 과거에서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유형, 때로는 무형의 형태로 자리한 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재출현한다. 그저 드러남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은닉하며 동시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어딘가에 숨었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이들은 그 어떤 새로운 생성보다도 현대적이며, 동시대적이고, 심지어는 이-시간, 동시간대에 놓여 긴박한 미래의 시간까지 탐닉한다. 

위베르만은 잔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잔존에 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출몰하는 기억 일반에 죽음을 선포하는 것만큼 헛된 것이 아닌가?" 


1
     생명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그것이 자리해 온 일련의 시간, 즉 역사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역사 개념은 특정한 시간 경험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이 경험은 역사-시간 속에 함축됨과 동시에 역사를 주조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경험은 서로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자신이 대면하는 개념을 유동적으로 변모시킨다. 어떤 장면에 대한 목격의 경험, 정신적 충격, 트라우마, 공감 등 경험으로서의 시간은 역사를 기억으로 전환한다. 시간으로서의 경험은 역사를 주관화하며 역사 이후의 시간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미지의 역사성에서 중심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매개자로서의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가 과거라고 칭하는 '지나간 시간'을 이미지화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응시함에 있어 일정한 기준점을 부여한다. 이를 통하여 보는 이의 시선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역사와 결부하여 대상화되는 동시에 주관화된다. 벤야민은 변증법적 이미지 이론을 통해 이런 이미지는 어떤 역사적 순간의 긴장을 갑자기 정지시킴과 동시에 전이함을 이야기한다. 이 변증법적 이미지는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대상을 갑자기 현재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대상에 응축되어 있던 힘이 어느 순간에 방출되어 지금-시간, 즉 살아 있는 현재로 변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이미지가 전달하는 것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모든 대상으로부터 분출될 수 있는 현재의 짧은 빛남이다.

     사물은 그들 각자에 내재하는 에너지와 힘들을 교환함으로써 상호 간에 직접적으로 소통한다. 사물의 언어는 약동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일종의 악장이다. 그리고 이 말 없는 언어는 다양한 번역을 통해서 인간의 언어가 되는데, 이 언어의 본질은 이름을 부르는 것(Bennenung)이다. 사물은 언어적 형식을 빌려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나 것이다. 때문에 사물들은 현재 속에서 스스로를 현실화한다. 이들은 이미지에 포착되었다고 해서 단지 정지 상태에 놓여있지 않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현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배열을 구성하는 역동성을 띤다. 이 활발한 사물의 장, 즉 복작한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이미지는 기존의 관계들을 언제든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사물은 현재를 현실화한다.


2
     현재하는 사물은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계속해 존재해왔다. 이 존재함의 근원에는 어떤 살아있는 힘(forces vives), 즉 생명이 존재한다. 생명 작용은 특정한 사건이나 시스템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약동하는 작용 그 자체이다. 역사적 생명은 콘텍스트(context)를 이루는 사건에 대한 공간적 작용임에 더불어 변화와 항상이라는 대비되는 힘 사이의 변증법이기도 하다. 생명은 어떠한 방향성이나 특정한 연속성 없이 그 자체로 자유롭고 또 비자유적인 운동의 지위를 갖는다. 이들의 생동적인 변신은 그 자체로 비물리적 역학 관계를 구성한다.

     생성은 지나치게 잠재적이고, 또 비가시적이기에 이를 직접적으로 목격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생성 과정의 잠재성은 궁극적으로 표면을 향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 있어서 생성되는 힘과 그러한 역량은 그 자체로 역사적 생명의 요소를 이루며 수천 가지의 맥락에 편입된다. 그러한 맥락의 구성 순서에 따라 우리는 선적인 시간 위에 놓인 역사로 인식하지만 생명에 있어서 역사는 끝없이 순환한다. 생명은 분명 변화하지만 장래, 또는 과거에 대하여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든 표면으로 드러나며 끝없는 잠재성으로 분화한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지배하고자 투쟁하는 수많은 힘이 공존하는 장이다.  상대적인 소멸과 끝없는 변신 과정에 사물은- 사물에 내재한 생명은 생성의 차원 속에서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 비물리적인 힘이라는 역설적인 움직임으로 존재한다.


3
     현대미술학회 C.A.S. 의 새 기획전 「언피지컬 리듬」은 동시대 작가 4인의 작업을 통해 잔존하는 생명의 흔적을 제시한다. 작품으로 제시되는 이미지- 일련의 사건과 사물은 잔존한 것과 생성되는 것들이 상호 배타적으로 기능하는 생명의 장으로 나타난다. 고우리는 물리적 작용의 결과로 발생한 어떤 흔적에 주목한다. 캔버스에 새겨진 이 충격의 파편 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비가시적인 감정적 층위를 생성하고, 또 다른 감정과 형상을 재생산한다. 박예지는 금속을 쌓아 올림으로써 시간의 축적을 가시화한다. 서로 다른 온도와 형태로 녹고 굳어진 이 금속의 층위는 연결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대를 지내온 거대한 물성적 맥을 구성한다. 정상우는 오독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이야기의 생성 가능성에 주목한다. 맥락을 찾지 못한 채 부유하는 서사적 조각은 그것이 해석될 수 있는 표면을 향한다. 지이호는 파편화된 신체를 통해 생명의 맥락을 재구성한다. 소망(消亡) 가능성이 배제된 신체는 두터운 시간의 경계를 함유하며 끝없는 잔존의 증거를 제시한다.

     생성의 매커니즘은 형태로써 그 모습을 가시화하고, 사물과 이미지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존재는 잔존의 시간과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하며 또 다른 역사를 스스로의 신체에 기록하고, 이를 어떠한 형태로 세상에 내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낙하하는 이미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이미지의 목격자가 되어 생동의 현장을 목도하고자 한다.




참고 문헌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서울: 현실문화 A, 2018.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바르부르크의 미술사와 유령의 시간』, 김병선 역, 서울: 새물결, 2022.
조르조 아감벤, 『유아기와 역사』, 조효원 역, 서울: 새물결, 2010.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김규철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9.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C.A.S.언피지컬 리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