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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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박예지는 2010년 파리 에꼴불 졸업 후부터 현재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작가이다. 박예지 작가는 용접기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의 작품은 방울방울의 철이 한 데 모여 잠시 굳어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렇게 가느다랗게 접해있는 점들, 혹은 선은 꼭 우리의 삶과 같이 역동적이다. 그런데 ‘접(接)’과 헤어짐은 인생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에 적용되는 규칙이기도 하다. 금속 방울들이 뭉쳐 만들어진 이 찰나의 순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가의 이전 작업들은 말의 형상을 다룬 것이 많다. 작가는 말 형상에 대해 말(馬)에 대한 애정을 담은 것일 수도, 말(言)에 대한 두려움은 담은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 수많은 표상과 뜻이 섞인 이 세계와 닮아있다. 모호한 형태가 얽히고설켜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박예지 작가의 작업은 얇게, 그렇지만 단단히 잇닿아있다. 마치 손을 내밀어주는 것처럼, 박예지 작가의 작품은 보는 사람마저 이어줄 듯 하다. 

- 큐레이팅 글

우리 모두의 역사는 맺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한다. 애틋했다 소홀했다 하는 인간관계처럼, 만나고 헤어지길 계속하는 매일처럼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없이 비정형적으로 쌓이고 또 무너진다. 하지만 끊어졌다고 해서, 어긋났다고 해서 예전의 일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꾸준히 모습을 바꾸어 가며 우리의 일부로 꿋꿋이 남는다. 그 축적과 이어짐은 사회부터 개인까지 크고 작은 것들을 구성하는 중요한 리듬으로 작용한다. 수많은 변주와 편곡을 거쳐서 말이다. 

꾸준히 살아남는 파편들은 각자의 역사를 지닌 채 유동적으로 붙었다 떨어진다. 그 움직임에는 어떤 계급도, 권리도 의무도 없으며 그저 세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할 뿐이다. 하지만, 박예지의 작품은 뭉쳤다 끊어졌다 하는 순간들을 끈질기게 붙잡아 둠으로써 흘러가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습관과 기억을 통해 아직까지 살아남은 파편들처럼, 타지 않고 액체처럼 변하는 금속조각들을 하나하나 쌓아서 보관해둔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파편들이 수많은 떨어짐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져 온 것처럼 박예지의 작품은 관람자의 찰나 역시도 맞닿게 하고 그 만남을 통해 순간의, 그렇지만 오래 기억될 화음을 이끌어낸다. 

박예지는 용접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의 작품들은 금속 파편 방울들이 한 데 모여 잠시 굳어있는 모습이다. 금속을 쌓거나 접붙여 만들었음에도 이들은 둔하거나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연약하고 예민하며 유연하다. 이렇게 가느다랗게 접해 있는 점들은 갓 생겨난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지기 직전인 것 같기도 하다. 생성과 소멸 두 양극단의 사이에서 앙상하게 뻗은 박예지의 작품은 그 결과 울퉁불퉁한 긴장감을 준다. 이러한 ‘접(接)’과 헤어짐의 아슬아슬한 약동은 이 세상 만물에서 발견되는 것이기에 우리와 공명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박예지의 작품 중에는 생명이 자라난 듯한 모습을 가진 게 많다. 작가는 이 같은 유기적 형상에 대해 한 생명체에 대한 애정을 담은 것일 수도, 일상의 감정을 담은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 수많은 표상과 뜻이 서로 얽히고 설킨 채 쌓여 있는 우리의 세계와 닮아 있다. 박예지의 작품이 가지는 해석의 여지들은 관람자들과 만나 각각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다. 혹자는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자는 자신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작품에 새로운 방울을 더하고 다른 금속 판을 깊숙이 새겨 넣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 같은 관람자와 작품 간의 관계들이 작품에 새 생명을 부여해 또다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들이 모여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그래서 유대의 축적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이어진 선들은 가지런하고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전복이 일어나기도 하고, 흘러내리거나 찢어지기도 한다. 위와 아래가 불분명해보이기도 하고, 중간중간이 갈라지거나 비뚤어져 있다. 박예지의 작품이 언뜻 웃자라거나 어색해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이 가지는 의미도 가끔은 틀어지고 어긋난다. 작품의 부분에 따라, 작품을 보는 횟수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쉬이 달라진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며 상기한 경험과 관람자가 부여한 뜻은 그 자체로도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박예지의 작품은 수많은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속에는 한 때 연결되어 있던 관계들의 흔적이 기억되어 있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했던 존재들의 에너지와 시간 역시도 함께 남아있다. 잔존하는 세계의 잔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박정연

박예지는 역사의 이면에서 발생하는 개별 존재들의 미시적 상호작용에 주목하여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언어라는 작은 단위를 가지고 작업한다. 만남과 헤어짐, 인연과 스쳐감을 위태로이 넘나들며 맺어진 저마다의 관계들은 본래 맥락에서 벗어나 세계의 기저에서 살아숨쉬며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는다. 관계,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말은 인간의 삶이라는 공통된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온 잔해이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 파편조각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 따르면 과거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현재에 소환되면서도 동시에 근원적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은 문명(文明)의 명문화(明文化) 과정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기록에서 생략된 과거의 잔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시대의 잔해나 이질적 침전물과 뒤섞이며 지층을 형성한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계를 지탱하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을 과거와 연결시킨다. 동시에, 그 잔해들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깨진 사기 그릇의 파편 조각처럼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 근친성을 지닌다.

박예지는 우리의 경험을 과거 존재와 연루시키고자 근원적 과거를 의도하는 파편적 잔해들을 발굴하고 축적하여 제시한다. 현재에 소환된 과거를 통해 우리는 근원적 과거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개인 간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유동적인 관계와 삶을 용접에 비유한다. 말 한 마디에 따라 우리 사이가 냉과 온을 오가듯이, 용접 또한 녹고 굳는 과정을 반복하기에, 그는 용접봉을 녹이고 쌓아올리는 행동 하나하나에 우리 존재에서부터 파생되는 모든 관계들을 담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fleur> 시리즈에는 말의 일부가 녹아들어 있다. 하나의 긴 용접봉이라는 공통분모에서 떨어져 나온 서로 다른 모양의 방울들은 미완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라스코의 동굴벽화 위로 다양한 염원을 담은 흔적들이 겹치듯, 그의 말은 인간 문명의 상징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관계의 집적이다. 열을 받아 용접봉 끝에 둥글게 맺힌 방울은 이내 떨어져 흘러내리고, 매끈한 모양 없이 뒤엉킨 파편들의 중첩은 불규칙한 리듬을 형성하며 상이한 시간과 맥락을 그러모은다. 잔해로서의 과거만 생각했을 때 불가능했던 존재들의 결집은 파편 조각으로서의 과거를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진다. 작품에 중첩된 인간 관계, 더 들어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 사이의 언어는 인간 삶의 역사라는 근원적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온 잔해이자 다시 결합 가능한 파편 조각이다. 박예지의 ‘관계 쌓기’는 말(言)로 비유되는 관계의 비선형적 결집을 통해 근원적 과거, 즉 말(馬)로 비유되는 거대한 인간의 발자취를 가냘프게 소환하는 작업이다. 이에 대해 개별 주체들의 미시적 역사를 쌓아올림과 동시에 과거 잔해를 발굴해 내려가는 행위라고 하겠다.

<Vigne>는 과거를 축적하여 현재로 소환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의 관객을 과거 존재와 연루시킨다. 작품 속 성글게 얽힌 관계들은 너와 내가 이어지듯,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박예지는 부유하는 잔해들을 건져내어 인간의 거대한 서사시를 가느다랗게 엮어낸다. 그리고 현재의 관객에게 과거와 이어지고 관계맺을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다. 쌓아올려진 관계들은 공간을 감싸듯이 배열되고, 이들의 흐름은 중앙의 원형에서 만난다. 작품 중앙의 보이드는 관객이 섬세하게 연결된 개개의 내러티브를 찬찬히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작가가 건져올린 개별 역사의 파편들은 새로운 맥락으로 편입되어 재창조된다. 이를 통해 잔해로서의 과거가 현재의 동기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다. 박예지의 말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따스함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세계의 기저에서, 우리의 무의식에서 살아남아온 과거 존재들의 생명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를 매개로 과거의 존재들과 현재의 관객 사이에서 맺어진 관계는 미시적 역사로 편입되어 새로운 리듬으로 흘러간다.
이태영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C.A.S.언피지컬 리듬